중국은 왜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유럽 국가들이 신항로와 신대륙을 찾아 탐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동안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는 중국은 뭘 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국은 운송체계의 발달, 농법의 향상과 정치적 안정을 배경으로 15세기 중엽에는 인구 1억명 이상을 부양하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였다. 명조 초기 중국 상인들은 동남아시아, 일본, 서남아시아 등 활발히 교역중이었음이 틀림 없었을 것이다.

당시 중구의 해운 및 해전능력은 연락제의 명을 받아 인도양으로 원정을 EJ난 징허라는 선단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몽골의 티무르제국이 발흥하여 서역과 육로무역이 장애를 겪자 영락제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징허에게 남해 인도양을 원정하여 많은 국가들과 조공관계를 수립하도록 명령하여 징허는 1405년부터 1433년 까지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실론, 페르시아만 홍해 및 아프리카 동부에 이르는 장거리 원정을 하였던 것이다. 징허의 원정으로 조공국은 30여개가 넘게 되었고, 다양한 산물들이 교류대상이 되었다. 그 원정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화교 사회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징허가 지휘한 해군은 인도양에 도달하기 60여년 전에 이미 그 지역에 조공무역체제를 구축하였으나, 포르투갈의 선단이 인도양에 이르렀을때에는 이미 중국인들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1433년 황제는 더 이상 항해를 금지하고 대양운항선의 파괴를 명하였고, 1479년에는 원정기록의 파기가 명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권력을 유지하던 환관 세력을 바다로부터 축출하려는 문인관료세력의 정치적 고려와 더불어 몽골족의 위협, 재정 어려움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중국인의 해외진출은 크게 제약을 받았었고, 중국은 내향적 조공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5세기는 향후 세계화의 전개에 중대한 계기를 이루게 되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놓고 중국과 유럽의 선택이 엇갈렸던 시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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