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서구 및 일부 비서구 지역에서 근대사회가 성립된 시기이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은 여러방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이행, 종교적 구속력의 약화와 세속적 가치의 대두,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전환,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의 경제구조 변화, 도시화의 진전과 익명성 사회의 대두, 절대주의적 통치를 대신한 시민권력의 부상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근대사회가 보여주는 이런 다양한 속성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각 속성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며,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명확히 가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의 전개속에서 근대사회의 태동을 알린 두가지 대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는 구래의 신분적 관계를 청산하고 시민적 자유를 만들어 내는 과정인 시민혁명이고, 하나는 근대적 산업사회를 형성시킨 산업혁명이라고 생각된다. 이 두 대격변의 구체적 시기와 역사적 의의에 관하여는 의견이 완전하게 통일되어 있지는 않지만 통설을 중심으로 두 혁명적 변화게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절대왕정은 지방단위로 분할되어 있던 중세의 정치구조를 극복하고 단일영토를 통일된 형태로 통치한다는 면에서 개혁적인 속성을 지녔다. 사람들의 사고도 변화하여 편협한 지방주의를 대신하여 광역적 수준의 민족의식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또 중상주의 정책을 통한 국가 간 경쟁은 기술혁신과 이윤창출의 동기를 경제주체들에게 불어넣어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절대왕정의 중상주의 정책이 반드시 미래지향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절대왕정은 자신의 권력기반인 관료제와 상비군의 유지, 확대를 위하여 그리고 자국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특권적 상공인에게 독점권을 부여하였고, 여러나라에서 도시의 길드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재편되었고, 이들의 독점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자유로운 상공업의 성장은 제도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촌에서도 영주제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경우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신기술의 도입과 제도개혁이 곤란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며, 진정한 근대사회가 탄생하려면 절대왕정의 국가주도형 정치 경제체제가 해소되고 신분제적 유제가 청산되어야만 했을것이다. 그리하여 신분상으로 자유로운 시민계급이 사회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자유롭게 경제행위를 영위하는 환경이 마련됐어야 하였고 이 과정을 역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바로 시민혁명이다.
영국의 시민혁명은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라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17세기 중반 영국의 절대왕정이 의회의 권한을 부정하며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내전이 발생하였고, 여기서 승리한 의회는 왕을 처형하고 의회의 권리를 재확인하였다. 왕정복고 후 다시 전제적 왕권이 대두하자 의회는 네덜란드로부터 새 왕을 영입하는 명예혁명을 단행하였고, 이로써 의회는 종래의 권리를 수호할 뿐 아니라 왕위계승에 대한 결정권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시민혁명은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지녔다. 지방에 근거한 젠트리와 성장하는 부르주아가 변혁을 주도하긴 하였지만, 명예혁명 이후의 정치체제는 국왕 및 작위귀족과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였다. 이런 제약하에 영국의 시민혁명은 군주의 봉건적 권리를 폐기하고 법의 지배 원칙을 세웠으며, 사적토지소유권을 확립하고 영업의 자유를 보장하며 시장경제 발전의 기틀을 닦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민혁명이 가장 철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진 곳은 아마 프랑스가 아닐까? 18세기에 프랑스는 신권이론을 받드는 절대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절대군주 아래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가 특권신분을 구성하였고,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평민층은 봉건적 의무와 무거운 과세에 시달렸다. 계몽주의로 무장하고 미국 독립혁명에 고무된 시민계급은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였고, 1789년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혁명의 막이 올랐다. 특권계급이 봉건적 사고에 사로잡혀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인접한 국가들로부터도 강한 압박이 밀려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와 민중과 연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천난 정치적 격변, 사회적 혼란, 경제적 위기를 거치며 프랑스는 결국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혁명의 정신은 인권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으며, 프랑스혁명은 소농민과 소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급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시민혁명에 비하여 평등의 색깔이 강하였고, 봉건적 제도의 철폐도 훨씬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시민혁명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대토지소유자나 대상공인의 등장이 지연되었고, 공업화는 이 조건하에서 진행되어야 했을것이다.
미국의 시민혁명은 영국의 중상주의적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영국이 식민지 미국의 무역활동은 통제하고 인지세를 비롯하여 다양한 세금은 부과한 데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발생하였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결속력을 높인 식민지의 대표자들은 1775년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하고 그 다음해 독립선언서를 공포함으로써 자연권에 입각하여 독립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은 중상주의 식민지가 지녔던 종속적 경제구조의 문제를 극복할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시민적 자유는 공인되었지만 아직 미국의 시민혁명은 미완성의 상태였다. 천부인권은 아직 백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을 뿐 농업 위주의 남부에는 노예제도라는 신분제가 온존하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시민혁명은 남북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1863년 노예해방이 선언되고서야 최종적으로 완수되었다.
서구 각국에서 진행된 시민혁명은 시기와 진행속도를 달리하며 진행되었고, 성과도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민혁명은 봉건적 또는 절대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제도를 철폐하고 시민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자보주의의 발전은 시민혁명의 필요성을 부각시켰고, 또한 시민혁명은 자본주의의 추가적 발건에 유리한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