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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요인을 생각해보면 바로 산업혁명기에 경제성장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는 점은 산업혁명기 이전 상당 기간에 걸쳐 이미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이 경쟁국에 비하여 어떤 면에서 공업화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산업혁명에 앞선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기도 한다.

농업부분이 공업부분에 영향을 주는 경로는 다양하다. 공업원료를 직접 생산하기도 하고, 식량생산으로 곡물가격을 낮추어 공업노동자의 실질적인 임금을 높여 주는 역할도 하며, 농업발달은 잉여 노동력을 배출하여 공업부문에 노동력이 공급되도록 하며, 공산품이 판매되는 시장역할을 수행하며 마지막으로 농업부분에서 축적된 자본이 공업부분에 투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모든 경로로 농업이 공업발전에 기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농업부문의 발전이 공업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된다.

3분제가 일반적이었던 중세의 경장방식은 17세기부터 휴한지에 토질개선효과가 있는 작물을 재배하는 관행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생산성의 증대를 경험하였다. 농업구조의 변화에 더욱 중요한 영향을 끼친것은 18세기 중반 이후 밀가격이 등귀하는 상황에서 진행된 인클로저 운동이었다. 인클로저란 공동경작과 공동사용의 형태로 운영되던 중세 이래의 개방경지와 공동지를 구획하고 이렇게 분할된 각각의 필지에 대하여 특정 지주가 배타적으로 소유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도 인클로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양의 사육이 주된 목적이었고, 인클로저가 이해당사자들 간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반면에 18세기 후반부터의 인클로저는 밀 경작지의 확보가 주 목적이었고, 이해 당사자의 합의가 없을 경우에는 입법을 통하여 대상토지의 일정 비율 이상을 소유한 지주의 합의로 인클로저를 강제할 수 있었다.

인클로저는 토지소유규모를 늘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런 배경하에 대지주는 전문적 농업경영을 차지농에게 맡기고 차지농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경작을 하는 방식이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인클로저는 그 자체로는 농업생산성을 크게 늘리지 않았지만, 토지소유규모의 확대와 전문농업경영인인 차지농의 등장을 통하여 신작물의 도입과 신경작접의 채택이 활발해지는 상황을 창출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휴한지에 터닙, 클로버를 재배하고 이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는 새윤작 방식이 있다. 윤작의 형태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지만 새로운 농법을 통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공업부분 내부에서도 18세기를 거치면서 주목할 만한 진전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대제에 기초한 가내수공업이 농촌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달하였다는 점과 더불어 숙련 수공업자를 배출하는 제도가 원활히 작동하였다는 점도 중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도제제도는 유럽 전역에서 청소년에게 기술교육을 담당한 핵심 제도로 생각된다. 장인이 도제가 되고자 하는 청소년의 부모로부터 등록금을 받고 업종에 따라 정해진 기간동안 기술을 전수하여 숙련된 수공업자가 되도록 하는 방식을 도제제도라고 하는데, 영국에서는 빈민법과 결합되어 운영됨으로 도제과정을 완료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다른나라보다 컸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도제가 되고자하는 수요는 높았고, 직종의 분화도 점차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