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를 위한 신항로 개척노력이 이루어진 이유

중세 르네상스라고 일컬었던 고전시대에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미술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 같지만, 자연과학, 순수과학, 기술적 개량으로 조선 및 항해술의 발달 등도 알려졌다. 나의 기준에서는 조선 및 항해술 발달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나침반의 도입, 지도 제작술도 발달하여 해양에 대한 지식이 크게 증가하였다고 생각된다. 선박에 대포를 장착함으로 전투능력도 크게 향상되었으며, 선박설계에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던 이탈리아인보다는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등에게 대양개척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기회였던 것 같다.

해양탐험의 직접적인 목적은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는데 있었으며, 향료등 동방의 값비싼 물품을 유럽시장에 파는 일은 중세 이래 이탈리아의 몫이었고, 그 동쪽으로는 이슬람 상인이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기존 무역로를 우회하여 향료생산지인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고, 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 인도에 가려는 시도속 포르투갈의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였고 그것은 인도 항로 개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인은 점차 인도양에서 아랍 상인을 축출하고 모잠비크 페르시아만 몰루카제도를 연결하는 무역기지망을 건설, 16세기 중엽에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이 시작되었다.

마르코폴로의 여행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제노아 출신의 콜럼버스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 향료생산지인 f인도로 가는 길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고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등에서 후원자를 물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렇지만 에스파냐의 군주인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가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약2개월의 항해 끝에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에 도달하였고 그곳이 인도라 믿으며 직항로의 발견을 자축하였던 것 같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새로 개척되고 있는 지역을 놓고 교황에게 분쟁가능성을 제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토르데시아스조약에 따라 분할선이 설정되며 아프리카 서단 지점을 통과하는 자오선 중심 서쪽에서 발견되는 영토는 에스파냐에 귀속되었고, 동쪽의 새로운 발견지는 포르투갈에 귀속되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해양탐험에 속속 합류하여 이탈리아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를 발견하였고 프랑스인은 세인트로렌스강을 처음으로 탐사하였다. 신대륙 발견의 주 이익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차지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했던 경쟁적 해양탐사는 중세사회의 정치적 구조변화를 반영한것이었으며, 봉건영주의 힘이 약화되고 교황권이 점차 세력을 상실하면서 왕권은 점차 강화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국왕은 자신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관료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상비군을 갖추었고, 이때 필요한 재원은 상공업자들이 납부하는 세금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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